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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내용발제) 파타고니아

  • [파타고니아 / 현암사 / 브루스 채트윈 / 김훈(역)]
  • [내용 발제 : 1-30장] 안데스산맥의 세레토레, 피치로이만 생각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가 저자 채트윈 한테 뒤통수 한대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이 든다.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라는 이책은 단지 여행을 다녀와서 뭘했고 거긴 뭐가 있는데 멋지지 신기하지로만 쓰여진 일반 여행책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확인 불가능 하지만 판타지적인 실화가 있고, 남아메리카 인디오들 및 칠로에섬 노동자들의 슬프고 격양된 이야기가 전개되며, 파타고니아로 도망친 유럽놈 미국놈들의 추악한 이야기와 러시아여성, 이란인, 일본놈들 이야기도 가끔 나오는데 채트윈 특유의 필치로 풀어가는게 아주 흥미롭다. 물론, 파타고니아의 자연, 동물, 건축물 그리고 그 마을의 전래 동화 같은 이야기도 나오긴 하지요. 검색해 보니 채트윈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과나코는 우리나라 동물원에서도 볼수 있다고 하는데 한번 가볼까 생각 중… 아, 그렇다고 채트윈이 좋다는 얘기는 절대 아님. 오해 없으시길…

1~30장 : 부에노스아레스 - 라플라타 - 바이아블랑카 - 파타고니아 사막 - 추부트 - 가이만 - 촐릴라 - 아로요페스카도 - 리오피코 까지

1장 : 남아메리카 파타고니아에 살고 있는 채트윈의 할머니의 사촌께서 할머니 결혼 선물로 밀라돈(나무늘보 처럼 생긴) 가죽이 있었는데 이게 채트윈이 파타고니아로 떠나게 해주는 이유가 된다. 그 가죽은 브론토사우루스(초식공룡) 가죽인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브론토사우루스가 대홍수 때 물에 빠져 죽었다고 배웠다. 노아가 방주에 실으려고 했지만 덩치가 너무 커서 그렇게 되었다나.], [브론토사우루스는 열대의 무더위를 통과하는 동안 다 썩어버려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곤죽이 되고 말았으니까. 오늘날 그 박물관에 뼈들만 전시되어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2장 :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러시아와 닮았다고 함. 에바의 시신 이야기가 나옴.

3~4장 : 라플라타는 대학 도시. 자연사박물관 이야기 나옴(주로 공룡 얘기). 아르헨티나의 일부 학술 단체에서는 고생물학자 아메기노(동물학적 먼로주의 주장)를 플라톤,뉴턴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음. 빌 필립스(할아버지가 파타고니아 개척자)을 만나 세양조에 빠져 죽은 아이 이야기 나눔.

5~9장 : 바이아블랑카 도착. 스코틀랜드인의 집에 들림. 파타고니아 사막 이야기 조금 나옴. 아라우카존 인디오(사람을 산 채로 껍질을 벗기는)과 프랑스 귀족 이야기 나옴. 푸에르노마드린의 웨일스인. 푸에르노마드린은 생테쥐페리가 [야간비행]에서 폭풍을 만난 대목을 서술할때 등장한 지역이기도 함.

10~16장 : 추부트, 가이만(웨일스인이 살고 있는) 도착. 피아노 잘치는 소년 안셀모, 안셀모가 소개하는 시인 이야기 나옴.

17~19장 : 에푸옌에 도착하여 밀턴 에번스를 만나서 인디오와 싸워서 마을을 창건 했다는 얘기를 들음. 미국 텍사스 주 탐그린 카운티 출신의 모험가 마틴 세필드 이야기 나옴.

20~25장 : 촐릴라 도착. 미국 산적 이야기 나옴. 술취한 인디오 이야기 나옴. 아로요페스카도의 무법자 이야기 나옴.

26~29장 : 금광이 있고 독일인이 정착한 리오피코 도착. 무법자(미국인)와 싸우는 라모스 오테로 이야기 나옴. 오테로 덕분에 정부에서 무법자 소탕.

30장 : 러시아여성 이야기 나옴.


부러진 피켈 – 영원한 산악인 윤치원 평전 (내용발제) 부러진피켈

1. 치원의 마지막 산, 사고의 예감, 산을 만나다, 에베레스트(EVEREST), 히말라야에 오르다. -. 윤치원, 강연룡, 김미곤, 박행수, 김주형, 김홍빈과셰르파는 2010년 4월 23일을 디데이로 잡고 마나슬루 정상공격에 나섰다. 기상악화(강풍, 영하30도, 화이트아웃현상), 8,000미터에서의 죽음의비박 등등으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당시 상황으로 강연룡은 고정로프를 찾지 못했으며, 박행수는 장갑을 잃어버린 맨손 상태로 심한 고소를 겪으면서 정신이 오락가락함. 윤치원과 김미곤이 강연룡과 박행수를 만났을 때는 상태가 심각, 윤치원은 탈진한 박행수를 위해 해발 7,800미터 지점에서 남기로 한다. 끝내 윤치원과 박행수는 돌아오지 못함. “행수는 숨졌다. 나도 하산하겠다”는 마지막 무전을 남기고 윤치원은 영원히 모습을 감췄다.

-. 2010년 4월 24일 기상악화로 조난당했다. 윤치원, 박행수가 실종 됐고, 김미곤, 강연룡, 원정대장김주형, 김홍빈은 헬기로 구조 됐으며 카트만두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 하고, 김홍빈과 김미곤은 치료를 받고, 현지 수색작업 지원에 나섬. 유족들은 4월29일 네팔 카트만두로 출국. 윤치원의 장례는 5월9일~11일 시신 없이 치러졌다. 윤치원의 죽음과 강연룡이 10개 손가락을 잃으면서 경남의 산악인들, 경남의 산꾼들은 큰 충격에 빠졌었다.

-. 지리산등산학교는 ‘강한 산악인’을 양성하기 위해 악명 높은 스파르타식 교육을 추구했다. 1992년 6월 29일 경남산악연맹 낭가파르바트 원정대는 코리안 스텝이라는 새로운 루트를 통해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이때 라인홀드 메스너가 묻었다는 깡통을 찾았다. 윤치원은 2010년 실종 당시 진해산악회 회장을 맡았고, 수학여행을 가지 않고 인수봉에서 대학 산학부원들과 자일을 묶었다. 윤치원은 1994년 여름 아이거, 마테호른, 그랑드조라스, 몽블랑을 오르면서 자신의 등반 능력과 추위, 배고픔, 고통을 인내하고 이겨내는 의미 있는 등반을 했다.

-. 티베트 셰르파들은 에베레스트를 초마룽마(Chomolungma)라는 명칭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네팔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은 ‘사가르마트(Sagarmatha)’다.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한 612명(남자 579명, 여자 33명)이 베이스캠프 이상 진출했으며 118명(남자 110명, 여자 8명)이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대원9명이 희생됐다.

-. 윤치원은 밀양산업대학교 기계학과에 재학 중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에 선발됐다. 1985년 지리산등산학교에 입교한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그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남서벽 루트를 따라 등반했다. 1995년 로체 정상 도전에 나선 윤치원은 정상 500미터를 남겨두고 위경련을 일으키며 정상에 서지 못했다. 그의 히말라야 첫번째 도전은 에베레스트, 로체 정상 문턱에서 안타깝게 주저앉고 말았다. 2008년 로체 정상에 선 윤치원은 무리한 나머지 맹장이 터졌지만 김재수와 무사히 하산했다.

2. 인샬라, 구름 위의 세상으로, 마칼루(MAKALU), 벌거벗은 산, 가장 위대한 등반 -. 1999년 7월 1일 윤치원, 강연룡은 북서릉~북봉~북동릉을 경유해 오후4시15분 가셔브룸4봉(7,925m) 정상을 밟는데 성공했다. 가셔브룸4봉 정상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험난했다. 정상 공격조를 결정하는 순간 윤치원은 이색적인 주장을 했다. ‘결혼을 하고 자녀가 있는 사람,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은 내려가라’ 라고…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의미)

-. 2000년 K2 원정에는 경남을 대표하는 산악인들이 총출동했다. 윤치원(진해산악회), 강연룡(히말라얀클럽) 두 사람은 대원으로 참가 했다. K2 등반 사상 한 팀에서 8명이라는 최대 등정 기록, 한국인 최초 무산소 등정기록을 남겼다. 윤치원은 1999년과 2000년 파키스탄 카라코롬산맥에서 가장 어렵다는 가셔브롬4봉과 K2를 잇따라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 윤치원이 참여한 2004년 한국가셔브롬1ㆍ2봉 원정대는 가셔브롬2봉 남서릉(노멀) 루트만 분석하고 등반계획을 세웠지만 남동릉 루트로 변경했다. 정상등정 후 박정헌은 페러글라이더를 이용, 30여 분간의 비행 끝에 베이스캠프 도착. 근데, 윤치원을 포함한 대원들은 중간 중간 등반대장의 글라이더 비행 장소를 물색하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렸고, 마지막 캠프까지 내려와서 ­날려 보냈다.

-. 윤치원은 2004년 로체남벽 등반에 나섰다. 4월 5일 김창호, 강연룡 등은 루트 작업조로, 윤치원은 수송조로 운행을 나섰으며 평균 경사도가 70도, 베이스캠에서 정상까지 3,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암벽은 인간의 접근을 거부했다. 윤치원은 로체 남벽에서 두 달간 악전고투했지만 결국 정상에 서지 못했다.

-. 2009년 마칼루 등반에서는 대원으로 윤치원과 강연룡을 포함시겼다. 윤치원은 등반력이 뛰어났고, 항상 주방에서 채용한 현지 요리사와 함께 의논하며 대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강연룡은 오랜된 산소통을 등정 기념으로 윤치원에게 건넸고 윤치원은 강연룡에게 등반구간에 있던 불필요한 스크류 30개를 회수해 강연룡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하면서 윤치원은 바로 앞에서 고미영의 추락을 지켜봤다. 아마 히말라야 원정에서 사고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이 처음이었다. 고미영의 사고 이후 윤치원은 수색작업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항상 누나로 부르며 따르던 고미영을 잃은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맛봤다.

-. 2000년 7월 몽블랑 등정에 나섰던 진해산악회 소속 대원 한 분이 조난됐다. 당시 K2를 등정한 윤치원은 친구 중광이의 사고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프랑스로 날아갔다. 모두 말없이 끝도 없는 눈을 퍼내고 또 퍼내고 수색 했지만 결국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다.

-. 독일의 산악인 마르쿠스 크론탈러는 브로드피크를 등정한 후 하산하다 목숨을 잃었다. 1년 후 그의 형이 8,000미터 ‘죽음의 지대’에서 동생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등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등반으로 평가 받는다.

3. 영혼의 산, 마나슬루 최악의 대참사, 2010년 혼돈의 마나슬루, 약속, 다시 네팔로 -. 마나슬루(8,163m)는 마나슬루 산군의 최고봉이자 세계 8위봉의 고봉이다. 마나슬루는 한국에게 비운의 산이었다. 1971년 김기섭 대원이 돌풍에 휘말려 크레바스에 추락사한 조난사는 마나슬루 등반사상 최초의 조난사로 기록됐다. 1972년 한국 마나슬루원정대는 5명의 대원, 세르파 10명이 사망하는 히말라야 등반 사상 세 번째 참사로 기록되고 말았다.

-. 2010년 한국도로공사 마나슬루 원정대는 4월 2일 베이스캠프(4,200m)에 도착. 원정대는 4월 22일에 맞춰 정상 공격에 나서기로 최종 결정하고 20일 베이스캠프를 출발, 22일 오후 3시 3캠프에 도착했다. 22일 오전 7시 30분 2캠프를 출발한 김주형 대장을 비롯한 5명의 도로공사팀과 김홍빈과셰르파4명은 뜻밖의 많은 눈에 고생해야 했다. 강연룡이 위험 구간이 끝나는 해발 7,800m대의 마나슬루라에 올라선 것은 4월 23일 오전 11시 30분이었다. 강연룡은 급경사 청빙구간이 마나슬루라 아래쪽에 설치해놓은 고정로프를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훑었으나 화이트아웃으로 고정로프를 찾지 못했다. 가장 컨디션이 좋은 김미곤은 설맹 증세를 보였다. 김미곤이 3캠프 도착한 것은 4월 25일 밤12시가 넘어서였다. 김미곤은 BC로 급한 상황을 무전으로 전한다. 4월 26일 오전7시 강연룡이 3캠프로 하산했다.

-. (1) 2010년 10월 11일 경남 진주 : 박정헌이 강연룡의 진주 고향집을 찾아가 강연룡 어머니를 위로한다. (2) 2010년 11월 8일 : … (3) 2010년 11월 15일 : … (4) 2010년 11월 17일 : … (5) 2010년 11월 20일 : 덕유산 훈련 (6) 2010년 11월 23일 : 박행수가 마지막으로 숨졌을 대 사진과 이야기를 종합하면 윤치원이 마지막까지 남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행수의 손에 양말이 끼워져 있었다. 이것이 윤치원이 끝까지 있었다는 증거다. (7) 2010년 11월 24일 : … (8) 2010년 12월 11일, 순천 깃대봉 훈련 : … (9) 2010년 12월 12일, 순천 팔마체육관 : … (10) 2011년 1월8~9일, 지리산 훈련. (11) 2011년 1월 18~23일, 한라산 훈련. (12) 2011년 3월 12일, 발대식.

-. 다시 네팔로 감.

4. 뒤늦은 합류, 멈춘 등반, 세상의 품으로, 치명적인 실수, 왜 산에 오르는가? -. 세상과 이별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윤치원은 태연하게 후배를 위해 산에 남았다. 그리고 후배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후 자신의 길을 걸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는 산을 내려왔다. 해발 7,400미터까지가 그가 내려온 마지막 높이였다. 프랑스에 있는 사랑스런 여인, 그리고 그의 아들, 고향의 형들과 누나를 생각하면 반드시 내려와야 했다. 해발 7,350미터에 박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려오는 코스는 빙벽과 크레바스가 많았다. 빙벽이 끝나는 7,300미터 지점에 유일하게 설원이 있다. 행수가 숨진 것을 확인한 치원이 형이 하산하겠다고 무전을 한 후 하산했을 경우 그 위치에 도착했을 것이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그것이다. 크레바스 안쪽으로 기다리다. 잠들었을 것이다.

-. ‘눈물은 떨어져도 숟가락은 올라간다’는 속담처럼 언젠가는 잊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번씩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윤치원이 사라진 후 남은 것은 카고백 네 개에 들어 있는 장비가 전부였다. 쉽게 와서 쉽게 갔다… - 차영민

-. 왜 이 같은 사고가 발생했을까? 가장 큰 문제는 통신 두절, 악천후, 판단력과 팀워크가 문제였던 것 같았다.


김헌상의 황금피켈 (기조발제)
황금피켈

저자는 본 책을 통해 ‘산과 삶과 죽음’이라는 화두를 소설로 환생 시켰다고 했다.

소설속 주인공 형식은 K2 북벽을 세계 최초로 등정 하여 성공을 하고 귀국을 하게 된다. 공항 입국장 기자회견에서 본 책의 소재가 되고 있는 에베레스트 북동릉 등반도 언급하게 되는데 이때 형식은 황금으로 된 피켈을 들고 에베레스트로 등반하러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는 두 젊은이 얘기를 통해 에베레스트 북동릉 등반을 오르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소설속 에베레스트는 에베레스트의 모든 루트가 등정됐고 오직 북동릉만이 남았다고 전개 된다.

K2 등반시 눈사태로 사망한 장부 셰르파의 친동생인 까뮈와 함께 난공불락의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오르는 형식은 널린 시신들을 목격 하면서 패배감에 잡히지만 결국은 그 위험한 피너클지대를 매우 강한 의지로 벗어난다. 그러나, 영국원정대가 있는 노멀루트에 도달하기 전에 까뮈 셰르파는 죽고 마는데 형식은 엄청 괴로워 하게 된다.

영국원정대 대장인 헌트는 이미 손가락, 발가락 동상이 심한 형식을 보고 내려 가라고 충고를 해되지만 형식은 정상을 향한다. 정상을 향하는 길에 다 죽어가는 이태리 대원을 보게 된다. 일단, 영국원정대에서 받은 자신의 산소통을 끼워 주고, 급히 정상을 찍고 다시 돌와 왔지만, 이미 이 이태리 대원은 거의 다 죽어 가고 있었다. 결국은 죽었다.

금세기 최후의 보루였던 에베레스트 북동릉 등정에 성공한 형식은 탈진하여 죽어가는 이태리 대원을 방치한 채 등정한 비윤리적 등반으로 폄훼 되어 하루아침에 산악영웅에서 인간 말종으로 전락 한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절단 되어 장애인이 됐고, 절친 광제가 다니는 아웃도어업체의 등산대리점을 했다가 쫄닥 망하고, 택시운전기사까지 하게 된다.

형식의 택시를 탄 손님이 북경에서 터키까지 휠체어로 여행 한다는 것에 힘을 얻어 재기를 해볼려는데 간암말기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

항암치료로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절친 광제와 함께 에베레스트 트레킹 길에 오른다. 형식은 그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보고, 절친 광제의 등짝에서 짧은 생을 마감 한다. 유골의 반은 인수봉에 뿌려지면서 형식의 붕어빵 아들 진호가 큰 산이 될것을 암시 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